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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지중해의 배들

by 부독자 2022. 10. 3.

그리스와 크레타의 배는 바다를 건너기에 다소 부적절했던 이집트의 원시적인 배를 대체한 모델이었다. 그리스인 선박 기사와 기술자들 덕택에 10세기 이후 조선술은 국가 경제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다. 오랜 시간 동안 조선술의 중심지로서 우수한 기술을 자랑했던 코린트에서는 조선 창을 두고 배를 대량 생산했다. 아테네의 경우 1년에 노가 3단으로 된 갤리선 360척, 4단으로 된 갤리선 50척, 5단으로 된 갤리 galley 선 7척을 제조했다. 앞에서 인용한 뒤에 묘사된 조선술은 널빤지를 구조재로 사용하는 이집트식 방법을 기초로 하되, 널빤지 사이를 연결하는 법을 개선하여 선체를 훨씬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즉 여러 개의 배밑판을 나무 핀으로 뼈대에 고정하고 장부 구멍과 장부로 이음매를 조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배를 만들기에 한결 좋은 긴 목재를 충분히 확보하여 길이가 짧은 널빤지를 사용하는 이집트 방식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세로 방향의 강도가 높아지자 가장 먼저, 이집트 선박 기사들의 위대한 발명품인 뱃머리와 꼬리 사이에 거는 굵은 장력 조절용 밧줄이 사라졌다. 전체의 모양도 변했다. 곡선이나 초승달 모양을 벗어나 길고 끝이 가늘어졌으며 물에 잠기는 부분(흘수)의 높이가 낮아졌다. 장식 문양을 새긴 뱃고물이 위로 길게 뻗은 모양만은 그리스 배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요소는 이물에 있는 날카로운 뱃머리 쇠붙이다. 뱃머리 쇠붙이의 발명은 조선술의 일대 혁신이었다. 뱃머리 쇠붙이는 전쟁에 쓰이는 무기였으므로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배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배가 갤리선이다. 갤리선은 16세기 이후 대포를 탑재한 배가 나타나 자리를 내줄 때까지 생명력을 유지했다. 고대의 배들은 돛을 단 전투선이라 해도 사실상 노를 주된 동력으로 사용했다. 돛은 긴 항해 도중 노잡이에게 휴식 시간을 줄 때라든가 바람이 알맞게 불 때만 사용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는 배를 조종하는 동시에 빨리 움직여야 했으므로 노가 배의 '엔진' 역할을 했다. 노를 2년이나 3단, 심지어 5단으로 배열한 갤리선도 등장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그리고 전쟁터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때는 뱃머리 쇠붙이를 이용했다. 해상에서 적을 발견하면 돛과 돛대의 높이를 낮추어버렸다. 돛 모양은 여전히 초기와 같은 사각형이었다. 그리스 선박에는 활대가 하나뿐이었는데, 활대를 돛대 맨 위까지 끌어올리게 되어 있었다. 돛 밑을 묶는 밧줄(범 각사가)로 활대 방향을 맞추는 시스템은 쌍 활대와 돛을 갖춘 이집트 배와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밧줄은 고정되어 있었고 바람이 부는 쪽 밧줄로 키잡이가 위치를 조절했다. 강풍이 몰아쳐 항해하기 어려우면 선원들은 돛을 짧게 하기 위해 돛의 아래쪽 모서리를 끌어올렸다. 그 모서리에는 활대를 지나 갑판까지 내려오는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베네치아 블라인드를 올리고 내리는 원리와 비슷하다. 돛은 보통 아마포의 가장자리를 겹쳐 바느질해서 만들었다. 얇고 두꺼운 두 가지 직물을 사용했는데, 이들을 같은 돛의 서로 다른 부위에 사용했는지 각각 따로 돛을 만들어 그때그때 부는 바람을 보면서 바꿔 달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논리적으로는 첫 번째 가설이 타당한 듯하다. 돛은 보조적인 추진력이었으며, 배에 선원들을 태우고 무기까지 싣고 나면 여분의 돛을 보관할 공간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상선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선은 전투선에 비해 폭이 넓은 데다 뱃머리 쇠붙이도 없었으므로 선체의 공간 전부를 화물을 싣는 데 사용했다 (노잡이들을 태울 경우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무게도 지나치게 많이 나갔으며, 당연히 음식까지 제공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상선은 돛을 주요 동력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항로에 잘 맞는 바람이 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배를 띄우곤 했다.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사료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인이 사용했던 화물선의 모양, 크기, 구조뿐 아니라 어떤 짐을 운반했는지도 잘 알 수 있다. 보통 이런 배로 운반한 물품은 곡물, 기름, 포도주 등 식품류였다. 1967년 키프로스 해역에서 발견된 유명한 난파선 키레니아 Kyrenia 호는 현대의 컨테이너와 비슷한 고대의 운반 수단으로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단지인 암표라 400개와 맷돌 30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아몬드를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키레니아로는 길이 15미터, 폭 4.4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배어서 상품을 7톤 이상 싣지 못했다. 키레니아 호에서 사각 돛을 매달았던 원제는 길이 가 12미터였다. 이 정도면 약 60제곱미터의 넓이를 가진 돛을 매달 수 있다. 통계적으로 계산해 보면 바람이 알맞게 부는 환경에서 이런 배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는 5노트(knot, 1노트는 1시간에 1해리, 곧 1852미터를 달리는 속도를 말한다. 기호는 Kt) 정도다. 학자들이 발굴한 다른 사료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화물 운반용 선박은 대체로 키레니아로보다 큰 규모다. 상선 선단이 운반한 화물은 평균 80톤을 넘지 않았지만, 그리스에 총길이 25미터 이상, 폭 7미터짜리 선박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기원전 3세기가 시작된 이래 500년 동안 지중해는 군선과 정기적으로 다니는 상선이 횡단하는 거대한 호수 같은 역할을 했다. 군선과 상선은 모두 당시 그 일대를 장악했던 로마인들이 운영했다. 다른 문명의 초기 단계에도 그러했듯, 제국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로마인도 바다보다는 육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사회가 발전하자 바다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 로마인들은 해상 지배력이라는 과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들은 확고한 결심으로 조선 기술 발전에 매진하여 100년 안에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해양 강국이 되었다. 그 규모와 세력은 2000년쯤 후에 영국이 누린 것에 비견될 만한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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