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역사는 위대한 문명의 발생기부터 인류의 역사와 평행선을 달렸다.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상 교통의 발달이, 문명의 탄생과 발달을 방해하기보다는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시기에서부터 18세기의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사회 변동은 모두 물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라 기보다는 육로보다 수로를 통한 이동이나 운송이 더욱 쉽고 편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흐르는 물에 나뭇가지가 아주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나뭇가지를 잡으면 별 힘을 들이지 않고 하류로 같이 떠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다음 단계로 우리 선조들은 나무줄기와 같이 물에 뜨는 물체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기 가운 곳곳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뗏목과 카누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인체의 연장으로 생각해서,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손과 발을 움직여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장대와 노를 사용하게 됐고, 이것이 발전해 돛이 등장했다. 추진력의 수단으로서 돛의 기원과 정확한 발명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스네프루 왕의 필사가 왕의 명령을 옮겨 쓰던 시대에 이미 항해 장치가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명령대로 배 40척으로 구성된 선단이 백향목의 고장, 레바논의 항구까지 급파되었다가 목재를 가득 싣고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 말이다. 인류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말리려고 펼쳐놓은 동물 가죽이 갑자기 휙 몰아친 바람에 날아 가 버리는 모습이나, 세찬 바람이 불 때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가 빠르게 물 위를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기원전 4000년 무렵에 이미 돛을 달고 항해하는 법이 알려졌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는 고대 수메르인 도시 에리 뒤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경의 유물인 점토로 만든 배 모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모형은 뱃머리 쪽으로 살짝 기운 세로축 위에 돛대를 세워야 하는 위치가 정확히 표시돼 있으며, 돛대를 지탱하는 밧줄을 동여매기 위해 널빤지에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다. 물은 교통과 통신 수단인 동시에, 정착할 주거지, 식량, 자재를 찾는 데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흐르는 물이 사람과 상품을 운송하는 수단이었다면, 돛은 이런 목적을 손쉽게 이룰 수 있는 효과적인 추진 장치였다. 무려 6000년 전부터 인류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던 셈이다. 돛을 단 배는 먼 옛날 고안된 이래 수천 년간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배를 수평으로 가로지른 막대로 사각을 지탱하는 형상은 바위에 새겨진 원시시대 조각이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토기 그림, 오늘날 아이들이 장난삼아 만드는 모형 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제 로마 화물선부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가 탔던 캐러 벨(caravel),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제독이 탔던 전투용 범선에서 칠레산 구리와 영국산 석탄과 철을 운반했던 20세기 초반의 마지막 윈드 재머 (windjammer) 범선을 살펴보는 동안 범선의 정수이자 상징인 사각 돛이 내내 바람에 나부끼며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에리 뒤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 배 모형에서 최초의 돛단배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바다에서 항해하는 진짜 범선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조금 더 후세로 가야 한다. 제일 먼저 지중해를 누빈 첫 번째 위대한 문명인 이집트 문명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에리들의 배는 작은 화물선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횡단하거나, 기껏해야 페르시아만 연안의 정착촌끼리 교류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이집트의 돛단배는 에리들의 배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원래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가거나 바람을 이용하여 강을 거슬러 운항할 목적으로 배를 만들었다. 그런데 얼마 뒤 다리를 넘어 지중해, 홍해, 인도양으로 나가야 했던 까닭에, 배의 기능을 보다 발전시켜야 하는 상황에 향 놓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집트인 조선 기사와 선 당 박 제작자들은 이후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그 오 돛단배의 형태와 제작 기술, 그리고 항해술의 기 기본적인 원리를 발명했다. 여전히 조잡하고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을 정도 왔고 건조기법이 단순했으나 이집트의 배는 곤돌라처럼 노 앞뒤 양 끝이 점차 가늘어지는 우아한 자태를 자랑했다. 특히 유선형이 매우 두드러지고 선체 측면은 독특한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는데, 사실 여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배에 하중을 견디는 골조로 가 없는 상황이 수백 년이나 지속되면서 널빤지가 그 역활을 수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건조 기술에는 짧은 널빤지를 이어 붙이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하나를 다른 하나에 걸쳐 널 놓고 천연 섬유로 만든 노끈을 이용해 가로세로 방향으로 엮은 것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당시에 긴 널빤지를 생산하는 기술이 없었던 데다. 그 근방에서 그만큼 키가 큰 나무를 찾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널빤지를 이어 배를 만들면 물에 띄웠을 때 자연스럽게 방수가 된다. 나무가 물을 먹고 노끈이 수축하여 각각의 이음매를 꽉 죄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 또는 바나나 모양으로 만든 덕분에 선체가 튼튼해졌다. 자동차 용어를 빌리자면 선체는 여러 개의 섀시로 나뉘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중을 받는 기능은 골조에 맡기고 선체 자체는 구조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배는 한참 뒤인 중세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고대의 배는 널빤지를 조립한 다음 골조를 끼워 넣는 구조를 이루었다. 골조의 역할은 선체의 일부, 무엇보다 널빤지 사이의 이음매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안쪽 용골은 없고 골조는 가벼운 늑대와 보로만 이루어졌다. 보는 짐을 싣는 곳인 갑판을 지탱하고, 늙자는 갑판에 꼭 맞게 끼워 넣었다.
인류 항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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