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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조선술의 발전

by 부독자 2022. 10. 3.

자잘한 변화를 거치기는 했지만 이런 유형의 배는 이후 1000년 가까이 지중해 곳곳을 누비며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전통을 토대로 조선술도 계속 발전했다. 로마 배에서도 여전히 선체를 이룬 널빤지가 구조재 역할을 했다. 널빤지의 재료로는 전나무, 소나무, 백향목 등을 사용했는데, 이들을 연결할 때는 틈새를 메우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장부 맞춤법을 사용했다. 선체 바닥에는 바다 생물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송진에 적신 천을 깔고 그 위에 납을 입혔으며, 흘수선 위로 색소를 넣은 밀랍이나 검은 송진을 한 번 더 발랐다. 바닥과 늑대와 내 용골은 참나무로 만들어 구리 못으로 선체에 연결하고, 위쪽에는 단단한 나무로 만든 핀을 박았다. 돛은 아마포로 만들었다. 삭고는 대마나 파피루스 줄기를 꼬아 만들었고 가죽끈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선박 제조와 재료에서는 발전이 있었지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장비를 개선한 덕에 로마 범선은 이전 시기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제작된 배들과 비교해 봐도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다. 로마 범선의 평균 속도는 4노트 정도였으며 일부 상선은 튀니지와 라치오, 시칠리아와 이집트 사이를 평균 6노트 속도로 돌파했다! 로마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지도와 해도 또한 항해와 항해술의 발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의 대형 화물선 선장은 1000년 뒤의 화물선 선장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후 첫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기 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니키아인은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마쳤다. 그리스 탐험가인 마리인 스킬락스Scylax는 선원들을 위해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포를 톨이라도 해도인 에리트레아 항해지를 편찬했다. 이 해도 첩에는 해안과 항구에 자주 부는 바람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설명이 담겨 있다. 또 마르세유 (마실리아라고 불린 그리스의 식민지)의 피테아스Pytheas는 북극성을 발견하여 자기가 살던 도시의 지리적 위치를 알아내고 지브롤터를 지나 노르웨이 해안까지 항해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리적인 탐험을 목적으로 바다를 항해한 사람이다. 요약하면 첫 번째 밀레니엄의 여명기부터 항해는 삶의 한 방식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또한 항해는 세력 확장과 문명의 발달을 위한 도구였다. 지중해와 북해의 지배자로 떠오른 로마인은 그 일대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각 나라와 민족이 바다에서 불리한 자연조건을 만날 때를 대비하여 만 등 여러 가지 배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러나 새롭게 받아들인 지식은 중세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냈고, 팍스 로마나 시기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군선의 경우 5~6세기까지 순찰 임무만 수행했으므로 로마인 조선 기사와 해군 제 독이 창안한 배는 설비 과잉인 측면도 있었다. 반면 화 물건은 제국의 수도와 각 지방을 오가며 효과적으로 운송 임무를 수행했다. 바다에서 뚜렷한 진전이 없는 가운데 육지에서는 거대한 역사적·사회적 변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민족이 침입한 뒤 로마 제국이 붕괴하기까지 혼란이 거듭된 것이다. 세계 문명의 중심지는 이탈리아반도를 떠나 비잔티움 제국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북유럽 일대도 이 시기에 처음으로 문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비잔틴 제국의 범선은 앞서 살펴본 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 년 전에 추진 수단으로 돛을 발전시킨 위대한 문명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 있었다. 비잔틴 선단의 상징은 '드로몬dromon' 이다. 도로 문은 노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는 대형 갤리선으로 돛은 삼각형이다. 삼각돛은 순풍이 불 때 올리기 쉽고, 전투가 벌어지면 끌어내리기도 그만큼 용이해 여러모로 편리했다. 도로 문은 16세기까지 돛을 단 전투선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치명적인 무기인 대포가 발명되고 대포를 싣기에 적합한 전투선인 갤리선이 등장하자 자취를 감추었다. 도로 문은 확실히 새롭게 발전했다기보다는 전 시대 배를 승계했음을 보여주는 유형의 배다. '리 galley 가 그리스어로 빠른 짐승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도로 문은 '달리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드로모스dromos' 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것에서도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초기의 도로 문에 관해서는 어떤 그림이나 설명도 전해지지 않아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아마도 이 배는 그리스에서 유래하여 로마인들이 정교하게 다듬은 듯하다. 도로 문에서 중요한 혁신에 해당하는 특징은 돛의 모양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일부 소형 상선을 제외하고는 사각 돛을 쓰는 일이 없었다. 이후 중세 말까지 지중해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배는 빠른 갤리선이다. 처음에는 비잔틴 제국의 갤리선, 그다음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스페인, 아랍의 갤리선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삼각돛을 달고 있었다. 삼각돛의 기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로마 제국 시대에 삼각돛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삼각돛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나, 역사적으로 아랍인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접촉하거나 정복한 나라마다 삼각돛을 채택했다는 사실 등으로 볼 때 이 돛은 아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돛의 삭고 장치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긴 활대다. 돛대 꼭대기로 활대의 중앙을 받친다는 점에서는 사각 돛과 같지만 과감하게 기울여 그 한쪽 끝을 이물에 고정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위쪽으로 뻗은 활대의 반대쪽 끝은 배의 양옆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를 이용해 삼각돛을 적절하게 조절하면, 비록 현대식 범선이 움직일 수 있는 각도에는 못 미칠지라도 바람을 거스르는 방향으로도 향해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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