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의 항해 방식과 기술은 근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예를 들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에서 내려다보이는 해변에 지나지 않던 항구는 로마 시대에 비로소 통상적인 역활과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티아 항은 로마의 발전에 필요한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지중해 전역에서 출발하여 하나로 모이는 무역 항로의 종착지가 되었는데, 이를 위해 건설 수요가 급증했다. 항구를 오가는 선원과 상인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거대한 건물들이 세워져 벌집처럼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이런 건물의 1층에는 보통 상점과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선술집이 성황을 이루었다. 오스티아에만 적어도 70개 이상의 회사가 생겨났는데, 그들의 활동 명세를 보면 지금의 수출입 상사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회사와 함께 조합도 설립되어, 해운업의 상호부조 기금으로 발전했다. 배의 누수를 방지하는 기술자, 선원, 어부, 부두 노동자, 상점 점원, 세관원에 이르기까지 직종별로 조합이 있었다. 이렇게 발전하는 데는 조선술과 항해술 면에서 로마인들이 쌓은 실력이 뒷받침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에는 독자적인 경험과 전통이 없었으므로 그리스와 페니키아 전통을 토대로 했다. 그리스의 기술은 자신의 세력권에서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가 손에 넣은 이탈리아 남부 영토 가운데에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페니키아가 보유한 기술은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확보할 수 있었다. 포에니 전쟁은 당시 중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보유하고 로마의 팽창을 저지하던 페니키아의 식민지 카르타고와 로마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로마인은 페니키아인의 선례와 기술을 알아낸 후 그것과 그리스의 기술을 결합하여 '로마식' 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함대를 구성하여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따라서 로마의 배는 이전 시대의 문명에서 만들어진 배들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로마인은 전쟁 무기와 기술뿐 아니라 돛을 동력으로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훗날 영국인들이 남긴 업적에 비견할 수 있다. 로마 범선은 추진력을 내는 수단으로 사각 돛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방식이 기동성 점을 금방 알아차린 선원들 은 돛대를 하나 더 세우고 제2의 돛을 달았다. 이 앞 돛 덕택에 배를 조종하기가 용이해졌다. 이 짧은 돛대가 최초의 앞 돛대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고물에 쉿 돛대를 세우고 3번째 돛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돛대를 두세 개씩 세우는 것은 규모가 큰 화물선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어선과 근해로 나가는 작은 배에는 여전히 선체 중앙에 커다란 돛대를 하나 세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배 가운데도 돛대를 축으로 하는 원대를 설치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배 앞뒤에 걸쳐 설치하는 주범主帆,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사형 斜 돛으로서 세찬 바람 속에서 항해하기에 좋았다. 특히 바람이 90도 방향으로 불 때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시도는 커다란 삼각돛으로 발전해 지중해 인근에 퍼졌다. 대형 범선에서는 돛대 꼭대기와 사각 돛 활대의 양쪽 끝에 연결하는 식으로 삼각형 중간 돛을 달기도 했다. 이것은 이제 지중해 너머 멀리까지 항해하며 꽤 많은 짐을 운반하게 된 배에서 돛의 면적을 늘려 속도를 높이는 효과적인 시스템이었다. 로마의 배는 이 새로운 돛을 도입한 덕분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돛 설치 방식과 그런 방식이 도입되고 뒤따라 등장한 선박 조종술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3세기에 제작된 부조 한 점이 있다. 이 부조는 마치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이 만드는 효과와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여, 배가 항구에 진입하는 순간 뱃전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년을 구조하려는 장면을 묘사했다. 우선 눈에 띄는 배 두 척 가운데 하나는 사각 돛과 앞 돛대를 단 커다란 화물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크기가 작고 사각형 돛을 단 배다. 큰 배가 소년을 구하려고 급히 출항하는데, 바로 그때 또 다른 커다란 화물선이 항구로 들어온다. 바람이 항구에서 바다 쪽으로 불고 있어,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는 화물선과 작은 배가 충돌할 것처럼 보인다. 정범식 돛을 단 작은 배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힘껏 나아간다. 실제로 종범 식 돛은 바람을 거슬러 가는 데 유리했다. 한편 뒤늦게 들어온 화물선은 앞 돛대를 세우고 사각 돛을 끌어내려 급회전하려고 한다. 이후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부조에 소년의 묘가 새겨진 점으로 보아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을 듯하다. 그러나 이 부조만으로도 로마 선원의 기술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들은 그저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긴 게 아니라 돛을 다루는 기술을 향상했다. 선체 모양을 비교해 보면, 화물선은 부피가 크고 건현(乾鉉 길다. 반면 군용 선박은 노를 2단, 3단, 4단, 많게는 5단까지 배치한 '롱 십 longship. 돛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완성되는데도, 공격 능력은 여전히 그리스인이 발명한 뱃머리 쇠붙이와 여러 명의 노잡이에게서 비롯된 기동성에 의존했다. 로마 갤리선은 그리스 갤리선과 크기가 비슷했으나, 화물선의 경우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던 커다란 로마 상선은 배수량이 1600톤에 달했다. 로마 상선 중 이시스 호에 관해 남아 있는 신빙성 있는 사료는 주목할 만하다. 이시스로는 길이가 55미터, 폭이 14미터에 이르고 화물 적재량은 1200~1300톤에 달했다. 이 거대한 배의 이물에는 선장과 키잡이가 쓰는 선실이 하나 있었다. 로마 귀족사회의 필수품인 향료, 직물, 보석 등 온갖 사치품을 수입하러 중동으로 향하는 상인들은 보통 갑판 위에서 숙식했다. 당시 상선은 승객을 실어 나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중해의 날씨는 보통 온화했지만, 때때로 일기가 좋지 않을 때면 갑판 위에 임시로 쳐놓은 천막 아래로 몸을 피했다 필요한 식수는 배 밑바닥에 큼지막한 물통을 신고 다니며 해결했다. 갑판의 천막 아래에 화로를 놓고 요리하기도 했다.
인류 항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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