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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이집트의 배

by 부독자 2022. 10. 3.

이집트의 배는 나일강의 잔잔한 물을 벗어나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과감하게 진출했다. 왕국이 번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무역을 원활히 하고 상품과 재물을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조잡한 데다 단순한 활 모양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이집트 선박은 구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이에 선박 제작자들은 기존 기술과 재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간단한 해결책을 마련했다. 식물의 줄기를 열어 가다가 꼬아 만든 굵은 밧줄로 배 앞뒤를 연결하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밧줄을 꼬아 만드는 방법은 섬유 노끈 가운데 나무 막대기를 끼워 넣는 기법에서 유래했다. 밧줄은 활 모양의 선체에 적절한 하중을 가하여, 파도에 부딪혀도 모양이 변하지 않을 정도로 배를 튼튼하게만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해결책에는 돛대를 배 세로축 위에 세울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는 쌍돛대를 발명한 여 해결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체에 수직 구 조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용골 위에 돛대를 세울 때 구조상 발생하는 동 하중이 집중되는 현상도 쌍돛대를 세움으로써 피할 수 있었다. 쌍돛대와 축을 이루는 굵은 밧줄은 고대의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집트 배만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도 돛은 사람의 본능에 가장 가깝고, 만들기 쉬운 평범한 모 양인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사 | 각 돛은 조금씩 개량되고 이따금 종범 형식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열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이집트 배에는 돛과 함께 원대 2개를 돛의 맨 위 모서리와 아래 모서리에 각기 하나씩 매달게 되어 있었다. 쌍돛대가 지닌 한계와 당시 항해술이 바람을 거스르거나 바람의 방향과 직각으로 배를 조종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돛의 방향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사료를 통해 항해사의 진정한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고대 이집트 범선의 크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돛단배는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교역을 위해 원정을 떠날 때는 길이가 50미터를 넘는 큰 배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동원했다. 그 정도면 나무로 만들 수 있는 선체의 최대 크기에 가까운 것이다. 이집트 제4왕조의 2대 왕인 쿠푸 Khufu (Cheops) 왕의 배는 상품 운반용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길이가 45미터, 너비가 5.8미터에 달했다. 이집트 동북부에 위치한 시나이반도에서 구리를 신고 홍해를 가로질러 운반하던 배는 길이 54.8미터, 폭 18미터가 넘었다. 그 배에는 약 120명의 선원이 승선할 수 있었다. 이상의 수치는 이집트 난파선의 선원이 남긴 게 록에서 얻은 것이다. 항해 사상 최초로 기록된 난파 사고로 보이는 이 기록에 따르면 그 불쌍한 선원이 탄 배는 홍해를 건너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났다. 선원은 간신히 시나이반도까지 헤엄쳐 가서 4개월 후 구리를 실으러 온 다른 이집트 배를 타고 돌아왔다. 이 기록만 봐도 이런 항해가 꽤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기와 섬의 님프 칼립소는 나사송곳을 몇 개 가지고 돌아왔다. 오디세우스는 나사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쐐기를 박아 목재를 조이면서 꿰맞추었다. 숙련된 장인이 커다란 배의 들보를 만들듯 폭이 넓은 뗏목을 만들고, 늑대에 배 갑판을 얹고 뱃전을 빙 둘러쳤다. 돛대를 만들어 활대 끝을 붙이고, 조종하는데 필요한 키도 만들었다. 파도가 칠 때 배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잔뜩 가져와 뗏목 둘레에 울타리를 둘렀다. 칼립소는 또 돛을 만들 아마포를 조 금씩 구해다 주었다. 그는 역시 뛰어난 솜씨로 돛을 만든 후 걸쇠와 밧줄로 단단히 붙들어 맸다. 마지막으로 지렛대로 뗏목을 들어 바다에 내려놓았다." 위의 글은 선박 제조에 관한 설명서 같지만 쓴 〈오디세이아 Odysseia) 의 일부로, 고대 그리스의 돛단배 제작 과정을 서술한 대목이다. 동지중해를 향해 남쪽으로 돌출된 반도이자 산이 많은 땅에 살던 그리스인은 크게 타인에게 돛 만드는 법과 항해술을 배웠다. 크레타임은 짧은 기간이지만 역사상 최초의 해양 강대국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며 바다를 지배한 종족이다. 크레타섬은 동지중해에서 수로를 이용하는 모든 전시 교역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2000~1500년경 문명의 중심지였던 크레타섬은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리비아인, 그리스인들에게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중동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인근 해역에서 빈번하게 해적질하여 문제가 되자 해양 군사력을 보유한 그래 타인은 자연히 해상 교통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그리스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여 군대를 굴복시키고 이제껏 누리던 무역에서의 유리한 지위를 앗아가며, 그 역할도 끝이 났다. 그리스가 해상 지배권을 획득하고 강화해 나가는 과정과 때를 같이하여, 역시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던 페니키아인도 만만치 않은 속도로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페니키아인은 해양 활동을 교역에 관계된 일에 국한하고, 지중해 전역과 '헤라클레스의 기둥 (대서양과 지중해의 좁은 관문) 너머의 넓은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일에 전념했다. 헤로도토스 (Herodotus)는 기원전 600년경 어느 페니키아 선단의 아픈 리카 일주에 대해 상세하고 신빙성 있는 역사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인도양과 홍해로 멀리 나아가서 적도 남단까지 내려간 뒤 아픈 리카 만에서 겨울을 났다 (고대에는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는 일이 늦은 봄과 여름, 이른 가을에만 허용됐다. 늦은 가을이면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이듬해 봄까지 가만히 놓아두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곡물의 씨앗을 뿌리고 이듬해 봄 수확을 끝낸 다음에야 그곳을 떠나, 출발한 지 2년 만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닿았다. 기록에 따르면 선단은 지중해를 횡단하고 그다음 해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토스의 기록 외에도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 여러 가지 증거 자료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페니 키워 인의 항해사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논리적으로 추론해 보면 페니키아의 배는 당시 그리스 나 크레타에서 만든 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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