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케이프 호너이자 마지막 화물 수 송용 가로돛 범선, 범선이 활기차게 일하던 시대를 마감한 최후의 걸작, 크루 젠슈테른호에 주목하라! 전설적인 항해기록에 빛나 는 그런 배는 두 번 다시 제작되지 않을 것이다. 크루젠슈테른호는 베세르뮌데에 위치한 J. C. 테 클렌보르크 조선소에서 건조하여 1926년 6월 24일 파두아' 라는 이름으로 진수한 배이다. 이 배는 함 부르크에 있는 해운회사인 페르디난트 라에이츠 소 유의 유명한 날아다니는 P-라이너 선단에서 막내였다. 파두아호는 기관이 없는 전통적인 케이프 혼 항해용 바크선으로, 선체 중앙부의 '리버풀 이라 는 이름의 갑판실에 훈련생 40여 명을 수용하는 숙 소를 추가한 정도밖에 차이점이 없었다. 크루젠슈테른호에는 닻줄 구멍에 꽂는 닻이 아닌 재래식 닻이 있다. 사진에서 닻의 가로 대는 직각으로 구부러져, 뱃전 의 기중기 바로 앞 난간 너머로 드리워져 있다. 기중기는 닻의 갈고리와 닻장을 선수 갑판 으로 들어 올리는데 사용된다. 파두아호는 그해 8월 26일 처녀항해를 떠나, 칠레 북부의 탈탈에서 실은 질산염을 1927년 4월 11일 네덜란드 델프질로 수송했다. 그리고 6월 16일 다시 닻을 올리고 함부르크에서 칠레 남부 탈카우아
노를 향해 2번째 항해를 떠났다. 파두아호는 1932년 3월부터 1933년이 거의 끝나 갈 때까지 대기 상태로 있다가 정부 보조금으로 운 항을 재개했다. 10월 31일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 리아 주의 월라루에 가서 곡물을 싣고 영국 아본머 스로 수송하는 항해였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 로 한 번 더 항해한 다음 11번째부터 14번째 항해는 다시 칠레로 떠났다. 화물수송선으로서의 마지막 항해가 된 15번째 항 해는 1938년 10월 14일 브레머하펜을 출발, 코랄과 발파라이소에서 질산염을 싣고 링컨 항까지 운반 한 다음 그곳에서 실은 밀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로 운반하는 경로였다. 전쟁 중 파두아호는 독일 최북단에 있는 플렌스부르크에 정박해 있다가, 1946년 1월 함부르크에서 스바인뮌데로 견인되어 갔다. 전쟁배상 차원에서 소련 해군에게 인계된 파 두아호는 세계일주 항해를 완수한 최초의 러시아 인 탐험가 아담 요한 폰 크루젠슈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의 이름을 따서 ‘크루젠슈 테른'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철자가 바뀐 이유는 동프러시아인 혈통을 지닌 크루젠슈테른의 이름을 시릴 알파벳 발음대로 쓴 다음 다시 라틴 알파벳으 로 음역했기 때문이다. 발틱 함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크루젠슈테른호 는 1959년까지는 항구에 머물렀다. 그리고 1959 ~1961년 수리해 처음으로 보조 기관을 장착 했다. 1961~1965년에는 해군 사관생도 훈련과 함께 대서양, 서인도 제도, 지중해에서 수로 측량 과 해양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 무렵 크루젠슈테른 호는 선체를 흰색으로 칠하고 활동했다. 1965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수산부로 소 속을 옮기고 소속 항구도 리가 항으로 바꾸어, 선 원을 훈련시켰다. 크루젠슈테른호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기관을 새로 설치하고 고물을 확장하 여 선체 중앙부의 '리버풀 객실과 통합했다. 그리 고는 선체를 다시 칠해 포문에 색을 입히고 현재 모습대로 검은색으로 칠했다. 1974년 크루젠슈테른호는 타바리시Tavarishch호와 함께, 소련 선박으로서는 최초로 톨 십 레이스에 참가했다. 크루젠 슈테른호는 1976년 미국 건국 200년 기념 대서양 횡단 레이 스에 참가하고 그 후로도 여타 의 톨 십 레이스와 서방에서 열 리는 범선대회에 고정적으로 참석했다. 예를 들면 1992년 콜럼버스 레가타와 2000년 톨 십 레이스에도 참가했다. 1980년 전후로 크루젠슈테 른호는 선적항을 에스토니아의 탈린 항으로 바꾸었다가, 에스 토니아가 독립국이 되기 직전 인 1991년 4월에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로 바꾸 었다. 이 화려한 바크선은 1992년부터 칼리닌그라 드 해양학교 소속이 되었다. 1990년 이후로는 어선 선원을 대상으로 훈련선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동 시에, 유료로 승선하는 '모험항해 훈련생도 탑승시 킨다.쇨란데 Sorlandet호는 1927년 노르웨이 쉴란데 주 주도인 크리스티안산에 있는 쉴란데 항해훈련선협회에서 상선대 훈련선으로 쓰기 위해 제작한 배였다. 건조 비용을 댄 해운업자 A.O.T. 셸브레 Skjelbred는 보조 동력장 치를 달지 않은 진짜 범선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 았다. | 쉴란데호는 1933년 노르웨이 대표로 시카고 만 국박람회에서 선을 보였다. 주로 북대서양에서 항 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독일군에게 징 발당하여 시르셰네스로 끌려가 군용 감옥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시르케네스에 있는 동안 러시아군에 게 폭격을 당해 흘수선에 구멍이 뚫려 정박지에서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독일군은 배를 크리스티 안산으로 끌고 가서 U-보트 선원을 위한 숙박 시설 로 사용했다. 종전 후 쉴란데호는 수리를 하고 1947년 정상 업 무에 복귀했다. 1950~1960년에도 개조작업이 진 행되어, 1956년 첫 톨 십 레이스에 참가할 무렵에는 보조 엔진을 갖추게 되었다. 쉴란데호는 엔진 없이 항해한 최후의 가로돛 훈련선이라는 기록을 나기 다. 실란데호는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톨 십 레이스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1973년 소속 기관에서는 쉴란데호를 발동기선 이 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쉴란데호는 이듬해 노글 웨이 선주 얀 스테우보Jan Staubo에게 매각되었다. 1977년에는 처음 기금을 위탁했던 셸브레의 손자인 크리스티안 셸브레 크누센 Kristian SkjelbredKnudsen의 지원으로 크리스티안산 시에 기증되었 다. 소유권은 쉴란데호 재단에 귀속되었다. 크리스티안산 시민들은 쉴란데호가 모험항해 훈 련선으로서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재 취역 비용은 자치단체와 도시의 유지들과 기업들이 부담했으며, 많은 지역 시민들이 시간과 노력을 제 공했다. 갑판에 방수용 루핑재 를 깔고 엔진을 새 로 장착하고 돛도 새로 제작하고 삭구 장치도 분해 하여 정밀 점검했다. | 쉴란데호는 범선에서 선원으로 일해 보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탑승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가로 돛 범선이다. 항해 경험이 전혀 없더라도 14~16세 이상이면 성별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쉴란데호가 모험항해 훈련선으로 첫 선을 보인 자리는 1980년 발트 해에 서 열린 톨 십 레이스였다. 그 이후로 쇨란데호는 한동안 톨십 레이스에 나가지 않았다. 재단 이사회 에서 위스키 회사가 후원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쇨란데호는 1981년에는 캐나 다로, 1986년 뉴욕으로 2번, 1991년에 는 아이슬란드로 고급 선원을 위한 직 업훈련 항해를 떠났다. 그리고 1995~1996년에는 서인도 제도로 항해 했다. 이어 1989년과 1999년에는 파리북서쪽 루앙에서, 1992년과 2000년에 는 브레스트에서 열린 톨 십 레이스에 참가했다. '예약 크루즈도 운영했다. 때로는 해군 사관생도를 훈련시키고 때 로는 직업 선원이 되려는 사람이나 실 업 상태인 젊은이들을 훈련시켰다. 2000년 쇨란데호는 발칸,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분쟁지대에서 온 젊은이들을 태우고 브레스트에서 열린 축제에 참여 했다. 2001년에는 북해와 발트 해에서 톨 십 레이스에 참가한 후 '시 트렉' 행 사의 일환으로 뉴욕까지 항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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