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선이 탄생한 시기를 정확하게 판별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범선이 서서히 쇠퇴하다가 밑바닥으로 추락한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것도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다른 배들이 회피하는 일부제 역의 무역 항로에서는 여전히 느리고 육중한 범선이 오갔기 때문이다. 범선의 최후를 선포한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할 수는 없어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흰 돛을 단 범선 대신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증기선이 해운업의 발. 전을 이끌었다고 말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범선이 사라지는 결과를 불러온 원인은 운송비용에 있었다. 무엇보다 기계 추진 장치의 영향이 컸다. 사실 기계 추진 장치는 새 세기를 앞둔 시점까지도 여전히 안정성이 떨어졌다. 외부에서 연료를 공급받던 초기에는 연료를 채우기 위해 수시로 항해를 중단해야 했고, 배에 장착한 게 관과 석탄 나무 등의 연료가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출력하는 동력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연기관인 디젤 엔진이 발명되어 그런 문제점이 상당 부분 해결되자 돛으로는 더 이상 기계 추진 장치를 따라잡을 길이 없었다. 1897년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이 발명한 디젤 엔진은 1912년 독일 선박 시란 대아 Seelandia 호에 처음으로 장착됐다. 항해의 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초기의 디젤 엔진은 35%의 효율을 달성했다. 평균 15% 효율을 내는 증기선과 경쟁하던 범선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 가 디젤 엔진은 산출하는 에너지에 비해 부피가 작고 보급선을 이용하여 항해 중인 배에 쉽게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편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통로가 늘어나고 항구도 많아져 지구상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점은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선박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마침내 가항 거리 제한이 없어졌다. 돛을 이용한 추진력의 마지막 강점마저 사라진 것이다. 돛의 강점은 거대 운하가 개통되자 더욱 무의미해졌다. 19세기에 수에즈 운하가 열리자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 항해하지 않고도 상품을 운송할 수 있었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이후로는 여러 대에 걸쳐 선원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케이프 혼을 일주할 필요가 없어졌다. 새로운 선박용 기름형의 발달을 촉진한 기술적 요인 더 있다. 강철을 재료로 쓰면서 목조 선박의 길이 한계선인 60미터를 넘는 배를 거뜬히 제작할 수 있었고, 선체 외판에도 강철을 사용하여 어떤 크기의 선체든 다 건조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는 이음매를 연결할 때 비용이 많이 들고 무거우며 견고함이 떨어지는 리벳 대신 용접 방식을 채택했다. 하지만 결국 해상 운송 수단으로서의 생명력을 결정한 요소는 용적량이었다. 범선의 경우 미국식 다 돛대 스쿠너선처럼 온갖 자동식 삭고 장치를 갖추고 있더라도 선체 길이가 증가하면 필요한 선원 수도 늘어났다. 그러나 기계 장치로 움직이는 배에서 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과거의 유령처럼 방랑하며 시대적인 흐름과 운명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움을 벌인 대형 범선으로 2척의 윈드 재머가 있었다. 바로 파미르 호화 파사트로다. 파로는 비요르크펠트Bjorkfeldt 선장의 지휘 아래 앤트워프 항구에서 출발하여 1948년 11월 뉴 거 일랜드의 오클랜드 항구에 도착하여 곡물을 실었다. 그것이 파미르 호에는 마지막 항해가 되었다. 파사트로도 파미르 호의 전철을 밟았다. 파미르 호화 파사트 호는, 핀란드의 구스타프 에릭슨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복구하여 운항한 라에이츠사의 선단에 속한 배 가운데 살아남은 단 두 척의 범선이었다. 1948년과 1949년 2차례의 곡물 운송할 해를 마친 후 해체되기 위해 벨기에로 갔다가, 독일의 한 회사에 넘어간 파미르 호화 파사트 호는 수리를 하고 보조 엔진을 설치하여 사관후보생 훈련선 1로 활용됐다. 파미르 호화 파사트 호는 결국 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파로는 1957년 남대생 서양 순항 중 소실되고 훈련생 5명만이 살아남았다. 같은 해에 파사트 호는 아르헨티나의 마르게 라카에서 출발하여 유럽으로 가는 도중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남아메리카에서 항해를 중단했다. 그리고 최종 정박지가 된 트라베 문제까지 가서 삭고 장치를 제거했다. 1967년에도 범선 한 척이 케이프 혼 일주를 떠났다. 몇 년간 조용히 정박해 있다가 칠레 경영자들에게 매각된 목조 스무니 레지나파 치어서 Regina Pario 호였다. 몰타 깃발을 펄럭이며 바다로 나간 레지나 파 치어서 호는, 칠레의 태평양 해안을 따라 항해한다. 가 케이프 혼을 돌아 뉴욕에 도착했다. 전후 두 척의 독일 윈드 재머와 레지나파 치어서 호가 수행한 항해로 인해 범선의 생명력이 여전하다는 점 한다면 어불성설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유명한 문학 작품에 소재를 제공하여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지게 해주었다. 범선을 이용하는 상업용 해상운송이 쇠퇴한 데는 경제 논리와 기술적 요인 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실상 1970년대에 짧은 기간 범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와 희망이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원인은 경제적인 부분, 즉 연료 비용이었다. 지질학적 요인이 아니라. 정치적 요인에 의해 무한정 쓸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원유 보유량이 갑자기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 경제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서구 경제가 한꺼번에 석유파동이라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기존 제도와 관행을 재검토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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