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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벨렘호와 세도프호

by 부독자 2022. 10. 17.

벨렝 호는 케이프 호 너를 만들어 유명해진 프랑스 낭트의 뒤 비중 조선소에서 1896년에 제작됐다. 서인도 무역선의 마지막 세대인 벨렝 호는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와 미국 남부의 동쪽 연안까지 왕복하는 무역선으로 제작된 작은 바크선이었다. 처음에 벨렝 호는 낭트가 드니 크루엔 필 수 앤드 라고 텔레비에야 소유였다. 당시 벨렝 호는 카디프에서 석탄을 싣고 라플라타강으로 운반한 다음, 몬테비데오 항에서 노새를 싣고 브라질의 항구 벨렝으로 가서 코코아 열매를 실은 후 프랑스의 메이주 초콜릿 공장으로 운반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1902년 5월 2일에는 아주 운이 좋았다. 근처 화산이 폭발하여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 4만 명에 게 엄청난 피해를 줬지만 번화한 항구인 마르티니크 항에 정박한 벨렝 호는 무사했다. 1907년 벨렝 호는 그 고기잡이 전주 프레르Demanges Frères 에게 매각된 뒤 프랑스에서부터 남미에 있는 프랑스령 섬 가이아나까지 식량과 보급품을 운반했 다. 벨렘호는 가이아나로 10차례 항해하고 나서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상품을 운반했다. 총 32번 대서양을 횡단한 벨렘 호는 1914년 상업 운송을 중단했다. 이후 이 배 를 사들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은 벨렘호를 개인 용 요트로 개조했다. 이전쟁 기간 중 벨렘호는 영국 고스포트의 캠퍼 앤드 니콜슨스 조선소에 있었다. 이때 바크선 삭 구 장치는 그대로 둔 채 보조엔진 한 쌍을 달았 다. 그리고 1919~1921년 지중해에서 순항했다. 1921년 양조 사업가 기네스A.. Guinness가 벨렘호를 구입하여, 이름을 판톰Fantome I로 바꾸고 북극과 캐나다까지 세계일주 항 해를 떠났다. 1939년 기네스가 사 망한 이후 이 배는 와이트 섬의 코우즈에 정박해 있었다. 1951년에는 이탈리아 백작 비 토리오 치니Vitorio Cini가 매입하여 베네치아에 있 는 선원 유자녀 학교인 치니 재단에 선사했다. 벨렘 호는 바컨틴 식으로 삭구를 개조하고, 백작의 아들 을 기리는 뜻에서 '조르조 치니Giorgio Cini' 라는 훈련선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아드리아 해에서 짧 은 유람항해를 하다가 1965년 재정적인 이유로 항 해를 중단했다.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국립경찰 카라비니에리가 훈련선으로 사용하고 대외적으로 경찰 이미지를 홍 보하려는 목적에서 이 배를 사들였다. 배를 목적에 맞게 개조하려고 1972년 베네치아에 있는 조선소로 보냈으나 개조 비용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조선소 에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자 배를 내주지 않다가 1974년 매각했다. 1979년 프랑스 국립저축은행이 나서서 구입하여 벨렘호라는 이름을 되찾아주었다. 프랑스 해군은 벨렘호를 브레스트 항으로 끌고 가서 수리한 후비 수기에 사관생도를 태우고 순항하는 임무를 맡겼 다. 벨렘호는 1982~1985년 파리에서 전시되면서 복구 작업이 진행됐다. 복구 작업은 1985년 완료되 어 연말에는 시험항해가 가능했다. 1986년 벨렘호는 자유의 여신상 헌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으로 항해를 떠났다. 그 이래 매년 3~10월 프랑스의 서부 해안과 지중해 쪽 해안을 따라 3~10일간 지속되는 짧은 여행을 떠난다. 세도프Sedov 호는 사상 최대 규모의 훈련 선이다. 가로돛 범선 중에서도 최대 규모를 뽐내던 세도프호는 2000년 로열 클리퍼 Royal Clipper호에 추월당했다. 세도프호는 1921년 키엘에 있는 게르마니아 베르 프트 조선소에서 제작됐다. 주문자는 브레멘에 있는 빈넨F. A. Vinnen 이 경영하는 해운회사였다. 이 배는 막달레네 빈넨Magdalene Vinnen이라는 이름으로 칠 레에서 질산염을 신고 케이프 혼을 거쳐 유럽으로 운반하기 위해 제작됐다. 원양 상업용 범선의 마지 막 보루였던 케이프 혼 무역항로, 즉 칠레산이나 호주산 질산염을 운반하는 항로에 띄우려고 만든 무역용 가로돛 범선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이기도 했다. 1936년 세도프호는 독일의 항구도시 브레머하펜 에 위치한 노르드도이체르 로이드 사에 팔렸다. 배 중앙부의 리버풀 하우스 또는 아일랜드(선체의 양 측 면까지 연장된 갑판실)와 고물 사이에 경갑판을 설치 하여 훈련생을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세도 프호는 증기선에 아직 빼앗기지 않은 마지막 해상 교역이었던 스코틀랜드와 호주 사이의 곡물 무역으 로 업종을 바꾸었다. 전쟁 기간 중 세도프호는 훈련 선 역할만 했고, 여름에는 발트 해에서 유람항해를 했다. 1945년 5월 세도프호는 전쟁 배상금의 일환으로 옛 소련에 헌납되었고, 1946년 1월 11일 공식적으 로 소비에트 발틱 함대에 편입되었다. 러시아 탐험 가 게오르기 J. 세도프Gerogi J. Sedov 의 이름을 따 서 세도프호로 불린 것은 이때부터였다. 1952년에 는 해군 훈련선으로 취역했고, 1957년부터 1958년 까지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을 맞이하여 옛 소련 과 학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으며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조사선박 역할을 했다. 1962~1965년 사이에 세도프호는 크루젠슈테른Kruzenshtern호와 함께 항해 했다. 두 척 모두 훈련 임무와 수로 측량, 해양학 연구 임무를 맡았다. 1965년이 되자 세도프호와 크루젠슈테른호는 소련 수산부로 옮겨 장교 지망생과 어선 선단에서 일할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세도프 호의 선적항도 리가 항으로 바뀌었다. 한편 1972~1975년 사이에 세도프호를 개조하는 작업 이 진행되었으나 기한 내에 끝나지 못해 나머지 작업은 1981년까지 크론슈타트에서 이루어졌다. 개 조 내역은 낡은 500마력 엔진을 1180마력짜리로 교체하는 것과, 최신식 전자 항해 장비를 갖추고, 숙박시설을 대폭 증축하여 훈련생 수용인원을 164 명으로 늘리는 것 등이었다. 세도프호는 1981년 운항을 재개했다. 1983년에는 옛 소련 선박이 된 후 최초로 예전 선적항 브레머하펜을 방문했다. 세도프호는 1986년 첫 참가 이래로 톨 십 레이 스에 자주 참여했으며 1992년에는 콜럼버스 레가 타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1989년부터는 소련 훈련 생 이외에 서구에서 온 '모험' 항해 훈련생도 탑승했다. 그러다가 라트비아가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인들은 1991년 4월 세도프호의 선적항을 라트비아 땅인 리가에서 무르만스크로 바꾸고 소유 권도 무르만스크 국립공대에 귀속시켰다. 2000년 7월 세도프호는 브레스트에서 열린 국제 톨 십 레이스에 초청받아 참여했다가 그대로 브리 스트 항에 억류되고 말았다. 러시아 정부가 수억 덜 러의 채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스위 회사가 영장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프로 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었고 하 터면 심각한 외교 분쟁까지 갈 뻔했다. 다행히 브 스트 법원에서 그 배는 국유재산이 아니라 민간 기 관의 자산이므로 정부 채무에 대한 책임을 부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태가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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