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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무역과 증기선

by 부독자 2022. 10. 9.

19~20세기에 제작된 범선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새로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체 중앙부에 선루를 세워 주갑판을 사실상 두 부분으로 나눈 점이다. 중앙부 선루는 클리퍼의 갑판실보다 폭이 넓었으며, 때때로 선루 폭이 배 전체 폭과 거의 같은 경우도 있었다. 종종 장교용 선실을 선루에 배치했기 때문에 고물에 위치한 선실에 머무르던 장교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 키잡이 역시 배 중앙부로 자리를 옮겨, 예전처럼 선미 갑판에서 타륜을 조종하다가 물에 흠뻑 젖곤 하는 일을 겪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선루에서 후갑판과 선수로 갑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주갑판 위로 설치했다. 파도가 사납게 치는 바다에서 배 이물과 고물 사이를 이동하는 선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통로였다. 이처럼 마지막 범선들은 강철로 만든 선체에 현 개화된 삭고 장치를 갖추고, 선체 측면은 나중에 기계 추진 장치가 있는 배의 전형을 이루게 되는 모양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선원 수는 좀처럼 30명을 넘기지 않으면서 더욱 어려운 항해에 도전했다. 클 리퍼 한 척이 자기 용적톤수의 2배에 해당하는 화물을 운반하곤 했다. 그레이스 하와 Grace Harar 호는 1930년대까지도 10명의 선원을 태우고 케이프 혼을 순회했다! 무장한 범선의 시대는 19세기로 끝나고, 이제 전 세계적으로 증기선만을 사용했다. 하지만 돛과 식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증기 기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던 데다 가항 거리를 늘리고 연료 공급에 덜 의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상선의 경우 방어 수단으로 화포를 장착할 필요가 없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범선은 오직 상업적 용도로만 쓰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용하게 사용됐지만 높은 화물을 운송하는 데는 더 이상 증기선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증기기관이 개량되고 점차 널리 보급됨에 따라 범선은 이익이 덜한 몇 가지 한정된 무역 항로에서만 활약하게 되었다. 위대한 범선의 시대는 스코틀랜드, 즉 리스의 클라이드 조선소나 애버딘에서 흔히 제한 1000~1500톤짜리 미국식 목조 클리퍼와 함께 막을 내렸다. | 양모 운반용 클리퍼는 중국에서 차를 실어 나르던 배들의 직계 후손으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이후 증기선으로 대체됐다. 이들이 활약한 기간은 짧았지만, 앞에서 서술한 커 티 사고 와 테르모필레로 사이의 멋진 대결 때문에 눈길을 끈다. 이런 클리퍼 가운데 한 척의 항해 기록을 추적해 보면 2~3년 동안 지속되는 항해가 다반사였다. 그동안 선원들은 멀리 떨어진 고향에 들르거나 연락 이를 취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항해는 매혹적이고 낭만적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상품 운송 임무를 통해 각 나라의 경제 활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13년 마지막 양모 운반용 클리퍼 중 하나로 제 노바인 사업가 드리고 Drag가 선주이고 역시 제노바인인 누이지 가출로 Luigi Gazzolo가 선장이던 약 라로 이 Yallaroi호가 돛을 올렸다. 마르세유에서지 붕 기와를 싣고 출발하여, 뉴질랜드 남부 더니든에 가서 다음 지시를 받을 예정이었다. 얄라로이호는 더니든에서 다시 호주 뉴캐슬로 가서 석탄을 싣고 칠레 안토파가스타까지 운반하기로 했다. 안토파가스타는 칠레 해안 지대의 섬들에서 질산염을 채취하여 수출하는 큰 항구였다.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질산염은 범선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아직 칠레로 가는 항해를 소화할 만큼 증기선의 가항 거리가 멀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학비료가 등장해 질산염 거래로 이윤을 남기기 어려워지자 범선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영국 선박 기술자들은 훨씬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여 증기선의 우위에 대항하기 위해서 클리퍼의 형태를 변경했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를 내고자 날렵하게 만든 선체 모양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영국 기술자들이 찾은 답 은 수송선을 다량으로 건조하는 것이었다. 수송선 이란 선체 폭을 넓히고 돛대 높이를 낮춘 대형 선박이었다. 수송선은 속도가 느렸지만 큰 화물을 잔뜩 실을 수 있고, 건조비와 운영비가 저렴해 이후 수십 년 동안 증기선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자 증기선은 금지구역처럼 여겨지던 케이프 혼 일주 항로를 반드시 통과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수송선마저 이류 항로용 선박으로 격하되고 마침내 명예롭지 못한 해체라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 무렵 대부분 영국에서 제작된 양모 운반 클리퍼나 수송선은 선체를 강철로 만들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활약한 미국의 마지막 범선, 이른바 다운 이스터는 여전히 나무 외판 방식으로 만든 배였다. 다운 이스터는 캐나다와 뉴잉글랜드에 있는 조선소에서 제작된 1500 ~2000톤짜리 대형 전장 범선이다. 이 배는 화물을 찾아 항구에서 항구로 옮겨 다녔는데, 일반적으로 남쪽 바다의 만으로 향했기 때문에 '케이프 호노 Cape Horne'이라고 불렸으며 특히 목재를 많이 운반했다. 북미의 큰 강 하구에서 목재를 싣고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북쪽으로 돌아올 때는 질산염과 곡물 등 부피가 많이 나가는 다양한 상품을 운반했다. 다운 이스터는 주로 지중해에서 수송선으로서 일생을 마감했다. 지중해에서는 그 배들의 고향인 북아메리카에 있는 섬 이름을 따라 노바 스코샤 Nova Scot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 해안 일대에서는 돛대가 3개 이상인 스쿠너도 얼마간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볼티모어와 글로 체스터에서 출발하여 진화한 어업용 스쿠너였다. 다른 유형의 전장 범선이나 브리간틴이 사각 돛을 단 것과는 달리 이 다 돛대 스쿠너들은 정범식 개를 돛을 설치했다. 근 해에서 무역용으로 제작된 경우는 건현을 낮추고 가동 용골을 만들어 작은 항구에 접근하기 편했다. 음에는 대부분 돛대를 3개로 제작했으나, 화물 적재 양을 늘려 높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선체 길이를 늘 이면서 1880년부터 돛대가 4개로 바뀐 유형을 제작했다. 이듬해에는 돛대가 5개인 스쿠너가 최초로 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돛대 6개짜리가 뒤를 이었다. 다 돛대 스쿠너선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토머스 W. 로슨Thomas W. Lawson 호는 길이 119.8미터에 돛대가 자그마치 7개였다. 목조로는 그렇게 큰 선체를 만들기가 불가능했으므로 재료는 당연히 강철이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범선은 대서양을 건너다가 영국 해안에서 침몰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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