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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목조범선의 마지막

by 부독자 2022. 10. 10.

돛대가 4개인 스쿠너는 특히 성공적이어서 최소 460척 이상이 생산됐다. 반면 돛이 5개 또는 6개인 유형은 선체 길이에 비해 강도가 떨어졌다. 다 돛대 스쿠너는 북아메리카 해안에서 증기선을 제치고 사실상 교역용 운송을 독점했다. 적은 선원으로도 조종할 수 있고, 짐을 싣지 않은 채 항해할 때 바닥에 자갈, 모래 등을 깔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했다. 다 돛대 스쿠너는 주로 해안에서 가까운 바다에서 활동했으며 때로는 대양을 횡단했다. 예컨대 1876년 아일랜드 시티 Island City 호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케이프 혼을 우회하여 단 100일 만에 호주에 도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플로리다주에서 건설 경기 가 호황을 누린 시기에 목재와 건설자재를 운반하는 데 다 돛대 스쿠너를 많이 이용했다. 유럽 회사인 소시에 타 나비 같이 오네 이탈로 아메리카나라는 유럽 회사에서도 미국 조선소에 돛대가 5개인 1500~2500톤의 대규모 강철 스쿠너를 18척이나 주문했다. 이때 제작된 스구니와 옛 모델의 차이는 주 돛대에 사각 돛을 단 적과 선체 모양이 옛 모델에 비해 매끈하지 않은 점이 전부였다. 그리고 사실상 선체 공간 전체가 화물칸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말이 가까워지자 선대 범선들의 후손이 되는 영광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은 마지막 세 대 범선인 윈드 재머가 등장했다. 어원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름에서, 증기선이 내뿜는 시 커먼 연기가 불길하게 시야를 가리던 시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한 줄기 바람까지 놓치지 않고 이용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연상할 수 있다. 반면 증기선에서 일하는 선원들이 아직도 사각 돛을 주렁주렁 매달고 바다를 누비는 거대한 배를 가리키는 말로 쓸 때는 경멸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윈드 재머는 규모가 큰 강철 선체에 돛대는 4~5개로, 앞 돛대, 주 돛대, 쉿 돛대에 사각 돛을 달고 보 나 벤 투르에는 정범식 세로돛을 단 바크선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윈드 재머는 호주에서는 석탄과 곡물을 싣고, 미국 북서부와 캐나다의 태평양 연안에서는 목재를 싣고, 미국 남부의 태평양에 면한 항구에서는 질산염을 실어 나르며 클리퍼의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활약상을 보였다. 윈드 재머는 선체 길이가 90미터를 훌쩍 넘고 배수량은 2000~3000톤이었다. 훨씬 작은 클리퍼와 비교할 때 화물 적재량은 몇 곱절이었고 속도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클리퍼와 마찬가지로 윈드 재머도 대양을 건너는 항로에서 대결을 벌였다. 그럴 때면 이 배들은 강철로 만든 선체와 삭고 장치가 견뎌낼 수 있다는 확신 아래 가장 센 바람을 돛에 가득 실었다. 1934년에는 헤르츠긴 체질이 Herzog in Cecile 오가 아직 범선의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배의 제조하지는 독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핀란드의 올란드섬 선적으로 항해했다. 헤르츠 긴 체칠리아 호는 남대서양 한가운데 범선의 마지막 무역로에 속하는 길을 따라 호주에서 실은 곡식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발하여 호주의 링컨 항으로 가던 중 리우데자네이루로 가던 영국 증기선과 마주쳤다. 세르조긴 체 칠 리에 호는 총면적이 4180제곱미터에 달하는 무거운 천으로 만든 돛을 모두 올려 활짝 펴고 바람의 힘을 이용해 35~40노트의 속도를 내며, 18노트 속 도로 달리던 증기선을 앞질렀다. 50년 전 커 티 사고가 달성한 위업을 다시 보는 듯했다. 이런 배들은 대체로 돛의 우수성과 깊이 뿌리내린 전통의 힘을 신뢰하는 선박 소유주들이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제작됐다. 윈드 재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잠수함에 빈 뻔히 격침당했다. 하지만 가장 피를 많이 흘리게만 든 적은 미국 최남단의 케이프 혼이었다. 1900 년에서 1914년까지 54척이나 되는 배가 케이프 혼을 일주하는 도중 침몰했고, 전쟁 이후 다시 바다로 내보낸 배들도 계속 케이프 혼에서 희생됐다. 1923 년 페이호Peiho 호가 이곳에서 침몰했으며 1929년에는 핀 나스 호의 돛대가 부러져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빠져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범선의 역사를 다루는 이 부분의 결말이 토마스 그로 팔로 Tomaso Giropallot 가 쓴 책의 마지막 단락 제목인 '마지막 돛단배 Ultima Vela'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로 팔로워가 쓴 책은 지나간 시대를 축복하고 그리워하는 멋진 문구로 가득 차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목조 범선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대부분 19세기 말에 일선에서 물러났고, 일부는 전쟁 중에 침몰했으며, 살아남은 소수는 무심하게 내버려져 방치되거나 작은 항구에서 잊혀갔다. 강철 범선은 살아남은 선박 수가 약 540척으로 많은 편이었다. 주로 유럽에서 제작한 선박이 살아남았고 몇 척은 북미에서 제작한 선박이었다. 하지만 이 배들도 몇 년 이내 모두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 전 세계의 군선과 상선은 모두 증기선이었다. 선단을 운영하던 독일인 에리라 페르디난트 on 이츠Erich Ferdinand Lacisz는 범선 항해에 다시 다 전했다. 그는 자기 선단에 속해 있었던 범선을 하 씩 다시 사들였다. 그 유명한 파미르 호를 비롯하여 파사트 Passat으로, 핀 나스 Pinnas 호, 페이호Peiho 호, Pecking으로, 파르마 Parma 호, 펠윔Pellworm 호 등이었다. 1926년에는 파 두어 Padua 호를 다시 주문하기도 했다. 3064톤의 파두 아호는 돛대 4개에 중앙부에는 섬이라 불리는 누각이 있는 웅장한 윈드 재머였다. 이렇게 큰 화물 수송용 범선의 진수식은 전 세계를 통틀어 다시없는 일이었다. 라에이츠는 이 선단으로 다시 해운업을 시작하여, 칠레와 호주로 가는 항로에서 질산 비료와 곡물을 운반하고 평상시에는 화물을 싣고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상선대 후보생도 태 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항구 도시인 보르도 와 낭트에 소속된 선단 범선을 통한 운송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1915년까지 독일과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프랑스 선박은 대부분 가라앉아 버렸고 겨우 낭트의 선박 몇 척만이 호주 곡물 무역로를 따라 항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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