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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석탄과 배

by 부독자 2022. 10. 8.
사바나호는 길이 30.5미터에 폭이 8.2미터인 소문 규모 선박이었다. 당시 ‘작은’ 배였던 서인도 무역 전 선도 그보다 2배는 컸다. 게다가 범선은 배 안의 공 호 간과 배수량을 전부 화물을 싣는 데 사용할 수 있어서다. 바로 이 점이 증기선의 확산을 가로막는 결정적 브인 장애물인 동시에 범선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바나호가 대서양을 횡단하기에 충분한 가항 거리를 확보하려면 기관에 넣을 석탄 75톤과 나무 92.90제곱미터 이상을 실어야 했다. 증기기관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외륜 대신 효율이 높은 프로펠러를 도입했는데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는 기계로 배를 움직이려면 에너지원을 탑재해야 한다는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반면 범선의 에너지원인 바람은 어디에서건 얻을 수 있었다. 증기선에 싣는 기계장치의 과도한 무게와 부피도 문제였는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사고 과정도 줄이는 부분적인 해결책이 있을 뿐이었다. 또한 19세기에는 항구가 그다지 많지 않아 하게 에 연료를 공급받는 것도 문제였다. 석탄 공급량이 부족했다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이 '문명화가 덜 된 대륙과 가까운 바다를 항해할 때는 연료 문제가 심각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됐다. 러시아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현실적으로 함대가 이동하는 항로는 정치적 요인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유럽과 동인도 제도 사이를 오가는 항해에는 결정적인 지름길이 생긴 셈이었다. 수에즈 운하는 차를 운반하던 클리퍼가 기술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특히 쓰라린 충격을 안겼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영국 조선소에서 진수하는 배 가운데 증기 추진 시스템이 없는 배는 10퍼센트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배는 변함없이 빽빽하게 설치한 돛과 돛대 사이로 증기기관의 일 부인 굴뚝이 우뚝 솟아 있다. 이제 범선의 전용 구역은 많이 남지 않았다. 이를테면 커티삭호가 가치를 증명해 보인 유럽 호주 항로와 같이 멀리 떨어지고 고립된 지역으로 가는 매우 긴 항로라든가,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던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을 공급해 주던 칠레로 가는 항로가 그러했다. 이런 지역들은 가항 거리에 한계가 있는 증기 선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 나무와 석탄을 보충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또한 범선은 해안에서 가까운 길도 계속 정기적으로 왕복하며, 건조 비용과 비교해서 확실히 이익을 볼 수 있는 상품을 운반했다. 범선의 역사에서 마지막 몇 장은 이러한 항로들 위에서 쓰였다. 랜튼 조선소에서는 커티삭호를 만들 이미 물에 띄울 배를 만들기에는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는 강철을 재료로 사용했다. 그전까지는 배는 무조건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나무는 저절로 물에 뜨는 성질을 지닌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커 티 사고는 골조를 나무가 아닌 강철로 만들고 그 위에 나무 외판을 씌운 복합 구조로 제작됐다. 강철을 사용하자 선체 강도가 증가했다. 따라서 질량 강도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더 큰 선박을 만들 수 있었고 앞에서 설명한 60~67미터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었다. 강철을 재료로 널리 사용하게 되면서 주조 기술과 금속 가공 기술도 전반적으로 개선됐다. 그런데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석탄 등의 연료를 충분히 획득할 수 있어야 했다. 19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영국은 석탄과 철광석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삼림 자원을 지나치게 많이 소모한 결과 국내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목재 공급량이 감소했다.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한 탓에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목재 역시 충분하지 못했다. 이러한 조건은 영국에서 조선술이 현저하게 발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국의 조선소에서는 좋든 싫든 2000년 이상 사용해 온 선박 재료와 건조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강철 재료를 채택하면서 관련된 기술을 연마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선바 이 만들기 좋은 나무가 풍부하고 석탄과 철광석은 희귀했던 미국은 사정이 달랐다. 미국 조선소에서 10세기 말까지 계속 목조로 선박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선박 규모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왔을 정도로 커졌다(예컨대 미국에서 제작한 돛대 17개짜리 스쿠너 토머스 W. 로슨Thomas W. Lawson 호는 길이가 자그마치 119.8미터였다). 삭고도 비슷한 속도로 발전했다. 우선 돛대와 원대를 만드는 재료가 강철 바뀌어, 보다 강도가 높고 무게는 가벼워졌다(나무로 만든 기둥은 끝부분이 압력에 극도로 취약해서 휘어진 게 마련이었으므로 꼭대기에 하중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돛을 제대로 지탱하게 하려면 돛대 직경을 크게 만들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무거워졌다). 강철을 사용하면 보다 길이가 길고 단일 부재로 이루어진 돛대를 제작할 수 있었다. 값비싼 데다 가공 비용이 많이 드는 나무보다 강철을 이용하면 제작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삼밧줄도 강철선으로 바뀌었다. 삼밧줄은 탄력성이 우수했지만 추진 장치의 철광석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값이 비싼 데다 금방 썩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돛대를 강철로 만들자면 기술적인 조화를 고려할 때 삼밧줄보다 강철선이 적합했다. 자연히 식구 장치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정차 각재를 모두 강철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기간 배는 기술적인 측면 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검게 되었다. 일단 범선이 내는 소리부터 달라졌다. 바람이 삭고 장치를 통과할 때 들리던 휘파람과도 비서가 소리, 목조 구조물이 압력을 받을 때 나는 소리가 사라지고 지루하게 덜거덕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더비 W. L.A. Derby는 이 소리를 다음과 같은 글로 표현했다. “... 그것들이 (각재들) 압력을 받으면 둔탁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가 기도하고, 전선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윙윙 소리를 내기도 한다. 밧줄은 밴조 현악기의 일종 옮긴이 줄처럼 부르르 떠는 소리를 낸다. 회전하는 조임쇠는 끊임없이 구슬프게 울부짖는다. 바람이 동삭動索을 통과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개중에 무거운 각재는 강철 돛대에 부딪히며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인 곡을 연주한다.” 작고에는 기계식 보조 장치를 도입해, 19세기 초 기 클리퍼보다 적은 수의 선원을 태우고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형 선박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돛과 원대를 고정하는 삭고 장치에 권양기를 설치했다고 해서 선원 각자의 부담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요한 인원수를 줄일 수 있었으므로 운영자로선 경제적 이익이 명백하다고 판단하여 다시 돛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권양기가 돛의 부활에 기여한 셈이다. 전에는 선원이 10명은 필요했던 일을 이제 2명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선장 자비스 J. C.B. Jarvis가 발명한 권양기는 1880년부터 마지막 범선의 시대에 활약하던 대형 범선 내의 삭고 장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재료와 규모를 제외하면 19세기 후반의 범선은 이전의 범선과 외관상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날렵한 선체는 볼티모어 스쿠너에서 시작되어 미국 클리퍼 제작자들이 발전시킨 형태였고, 돛과 돛대는 전통적인 전장 범선 혹은 브리간틴과 같았지만 고 낮아지고 돛대 수가 늘어났다. 이 또한 비용 절감을 위해 선원 수를 줄이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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