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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선체의 발전

by 부독자 2022. 10. 6.
그는 먼 옛날부터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져 온 대구 머리 고등어 꼬리 Glidden & Williams 이론이 빠른 선체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라고 주장했다. 넓적한 뱃머리가 파도에 부딪힐 때 하얗게 이는 물보라 가 눈을 현혹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옳았다. 그가 강력하게 지지한 다른 가설은, 속도가 길이에 의해 좌우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길이가 짧고 폭이 좁게 만든 배보다는 이 물이 뾰족하고 부피에 비해 최대한 길게 만든 배가 낫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리피스가 레인보 Rainbow 호를 제작할 때는 당혹스러워했지만 배가 첫 항해를 마친 뒤에는 찬사를 보냈다. 레인 보호는 뉴욕에서 홍콩까지 가서 값비싼 찻잎을 싣고 돌아온 처녀항해 이후 종종 14노트 | 까지 내면서 기록을 거듭 경신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항로는 극동을 오가는 무역항으로 못지않게 중요한 노선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에 자원이 풍부하고 특히 금이 난다는 사실 이 서부로의 인구 대이동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그리피스가 만든 클리퍼 시 위치 Sea Witch 호는 97일 이라는 기록적인 시간에 항해를 마쳤고, 출발하기 전에 8만 4626달러에 사들인 상품을 도착 후에 27만 5000달러에 팔았다. 그 순이익만 해도 배 제작 비용의 3배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잉글랜드에 있는 조선소에는 클리퍼 주문이 폭주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무려 1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클리퍼를 건조하는 일에 종사했다. 도널드 매케이는 저명한 미국 클리퍼 제작자로, 어떤 누구 못지않게 많은 배를 제작했다. 첫 작품은 1850년 매사추세츠주 이스트 보스턴에 있는 조선 소에서 완성한 스태크 하순 그 Stag Hound 호였다. 당시 역대 최대 규모 상선이었던 이 배가 캘리포니아를 지나 동쪽으로 처녀항해를 마쳤을 때, 선주인 보스턴 상인 두 사람이 올린 수익은 건조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다. 이듬해에는 플라잉 클라우드 Flying Cloud 호가 뒤를 이었다. 이 배는 훨씬 대규모로 무게 1750톤, 길 이 70미터, 폭 12.5미터였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던 처녀항해에서는 서프라이즈 Surprise 호의 기록을 일주일이나 줄인 89일 만에 항해를 마쳤다. 최고 18노트의 속도로 하루에 602킬로미터를 돌파한 셈이었다. 과거의 어떤 범선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클리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설계자들은 디자인을 다듬고, 제작자들은 자기 조선소에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애썼다. 무엇보다 선주들이 아우성을 쳐 가며 가장 빠른 배를 찾았다. 선장들은 항해 시간을 며칠 또는 몇 시간이라도 단축하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19세기 중엽부터 말까지는 실로 환상적인 시대가 펼쳐졌다. 수많은 클리퍼가 미국 부근 항로와 유서 깊은 중국과 영국 사이의 차 무역 항로, 호주와 영국 사이의 양모 무역 항로를 넘나들었다. 선박 기술자와 선장에게는 운반한 화물이 얼마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가에 따라 포상이 주어졌다. 화물을 먼저 하 욕하는 배는 운반한 상품을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선장들의 자존심도 대대적인 경쟁을 유발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1851년에는 45척이나 되는 클리퍼 가 뉴욕과 캘리포니아 사이를 오가며 화물을 날랐다. 89일 만에 완주한 플라잉 클라우드호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이 기록을 깨려는 의욕을 불태우며 15척의 클리퍼가 각기 3일 간격으로 항구를 떠났다. 996톤짜리 와일드 피전 Wild Pigeon으로, 1505톤째 리 플라잉 피시 Flying Fish로, 1089톤짜리 존 길핀 John Gil pin 호가 선두를 다투었다. 그해의 대결을 상세히 기록한 모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3척의 배가 서로 닿을락 말락 하면서 3개월 동안 총 2만 414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최고 속력으로 항해했다. 이 대결에서는 매케이가 제작한 플라잉 피 시호가 92일 만에 가장 먼저 돌아왔고, 36시간 후에 존 길핀 호가 돌아왔다. 와일드 피전 호는 6일 후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바람이 잦아들어 캘리포니아 해안에 멈추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50년에 미국에서 제작한 클리퍼는 모두 16척이었지만 이듬해에는 24척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클리퍼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1852년이 되자 61척, 1853년에는 105 클리퍼가 제작되었다. 1853년은 매케이의 조시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클리퍼 그레이트 리 핏빛 비 Great Republic 호를 진수한 해이기도 했다. 이 길이가 91.44미터를 넘었으며, 돛대가 4개에 도 면적이 1만 3000제곱미터에 가까웠고 화물 적재라 은 6,000톤이었다(앞에서 언급한 대로 목조 선박에서는 60미터를 넘는 선체를 만들 수 없었으나 철을 사용하고 신식 건조기술을 도입하면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증기 기관을 도입하자 조선소에서 접합부를 자르고 구멍을 뚫는 작업을 정교하게 하고 구조재를 대형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레이트 리퍼블릭 호는 첫 항해를 떠나기도 전에 화염에 휩싸였다. 뉴욕항 근처에 있는 건물에서 난 불이 배에 옮겨붙은 탓이었다. 다행히 배는 불타 없어지지 않았고 몇 년 후에 개조를 거쳤지만, 돛대 길이가 짧아지고 화물 적재량도 줄어들었다. 매케이는 그 이후로도 27년 동안 조선업에 종사하면서 범선 38척을 더 제작했다. 그가 은퇴한 시기는 클리퍼의 시대가 마감되는 시점과도 맞아떨어졌다. 전설적인 존재인 클리퍼의 뒤를 이은 범선은 보 다 격이 낮은 다운 이스터 down easter였다. 화물을 운반한 범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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