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12월 3일, 미국 클리퍼 오리엔탈 5 Oriental 호가 런던항의 웨스트 인디아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배 안에는 97일 전 홍콩에서 실은 차가 실려 있었다. 영국에서 동인 도 무역선이 바다를 누비던 때에! 그 사실을 두고 런던의 신문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온 국민이 우려를 표하고 흥분하고 있다. 마치 1773년 보스턴 항에서 벌어진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미국 독립혁명의 불씨가 된 보스턴 차 사건' 때와 비슷하게..." 실제로 그 무렵 바다에서 진행되던 일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영국은 바로 1년 전 식민지 무역에서 자국 선박이 독점권을 갖는 항해조례를 폐지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무역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아 손해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국 조선소들도 새로운 흐름에 문을 열었다. 이제 먼 바다를 항해할 범선을 만들 때는 낮고 굵은 돛대와 폭이 넓은 선체를 쓰지 않았다. 수백 년간 선박 설계 도면이 제자리에 머물게 만든 이론을 전면 부정하고 미국에서 얻은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오리엔탈 호가 사람들이 기다려 마지않던 차를 내려놓는 동안 영국 해군 본부는 선장에게 선체를 살펴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인 선박 기술자들은 부두로 끌고 온 오리엔탈 호를 통해 미국 클리퍼의 형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 조선소에 서도 새로운 유형의 범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만든 클리퍼는 미국식 클리퍼보다 작은 크기로, 목조 선체의 한계인 60미터 이하였으나 속 도로는 미국 클리퍼에 뒤지지 않았다. 선체 길이와 관련된 값인 '이론상 최고 속도로 따지면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평균 속도는 비슷하다. 영국 클리퍼는 영국 범선이 다니는 항로의 특징인 약한 바람 부는 조건에 잘 맞았을 것이다. 영국 클리퍼 역시 극적인 속도 경쟁을 펼쳤다. 특히 차 무역로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1866년에는 10척이나 되는 클리퍼가 민 강 푸저우에 모여 향기로운 차를 경쟁적으로 실었다. 16척 가운데는 처녀 항해에 나선 815톤짜리 태칭Taetsing호, 전년 에2의 을 기록한 767톤의 태핑 Taping으로, 700톤의 세리나 Seria 호, 네 번이나 우승한 전력이 있는 피어리 큰 로스 Fiery Cross 호, 첫 항해에 나선 유력한 우승 후보인 853톤짜리 아리엘 Ariel 호가 있었다. 항해가 끝날 무렵인 99일째 14노트로 항해하던 아리엘 호가 태핑 호를 단 1.5킬로미터 차이로 앞섰다. 두 척의 배는 템스강 하구에 나란히 들어왔으나 태핑 호가 먼저 부두에 닿았다. 100일간의 항해 끝에 불과 1시간 차이로 승부가 났다. 3년 후, 스코틀랜드 덤버턴에 있는 스콧 앤드 린 튼 조선소는 커 티사가 호를 진수했다. 고대 스코틀랜드 전설에 나오는 '커 티사가' 이야기는 이렇다. 어두컴컴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한 젊은 남자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무서운 마녀들이 뒤에서 쫓아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겁에 질려 말에 박차를 가하던 남자는 젊고 아리따운 마녀 하나가 짧은 '커 티사가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성의 슈미즈를 그렇게 불렀다)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말을 멈추고 마녀를 향해 “근사한 커 티 삭이는군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바람이 잦아들고 번개가 멈추며 마녀들이 사라졌다. 젊은 남자는 간신히 집을 찾아간다. 이 이야기와 유명한 차 무역선 커티삭의 연결고리는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즉 스코틀랜드 배이고 스코틀랜드 전설이라는 것뿐이다. 커 티 사고는 자기 이름을 딴 조선소를 운영하던 허큘리스 린튼Hercules Linton이 설계했다. 선주 조크 윌리스 Jock Willis는 19세기 후반에 런던에서 활약한 유명한 차 수입상이었다. 무엇보다 윌리스는 바다를 잘 알았고, 증기를 내뿜는 배들이 확고한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돛에 대한 애정을 간직 한 사람이었다. 커 티 사고는 1869년 11월 진수식을 열고 석 달 후 차를 싣기 위해 다른 배들과 함께 중국으로 처녀항해를 떠났다. 커 티 사고는 110일 만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가장 빨랐던 테르모필레 Thermopylae 후보다 5일 더 걸린 셈이다. 이듬해에 커 티 사고는 아리엘 호를 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873년까지 3번 연거푸 경주에서 진 이후 테르모필레 호의 우위를 인정해야 했다. 사실 커 티 사고는 뛰어나게 빠른 배는 아니지만 잘 견딘 배로 대표적인 클리퍼로 거론된다. 오랫동안 일선에서 활약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커 티 사고는 대서양에 오가는 석탄 운반선으로 바뀌었으나 역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영광의 시대는 나중에 찾아왔다. 8년간 차를 운반하고 5년간 석탄을 나르고 난 후 커 티 사고는 양모 무역을 위해 호주로 항해하게 되었고, 여기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커 티 사고는 1883년 최초로 시드니에서 런던까지 항해에 나서 82일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최대의 적수 테르모필레로는 항상 커 티 삭과 나란히 질주하며 엇비슷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1885년 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해 커 티 사고는 시드니에서 출발하여 테르모필레 호를 비롯한 클리퍼 8척을 제치고 73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이어 호주 앞 바다에서는 돛을 최대로 펴 17노트의 속도로 항해한 여, 역시 시드니로 가던 증기선 브리타니아 Britannia 호를 추월했다. 무적으로 이름난 증기 기관에 대한 통쾌한 복수였다. 사실상 19세기 말에 이르면 돛은 증기기관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클리퍼는 수명이 평균 10년 정도로 매우 짧은 편으로 날씨 혹은 항해상의 실수로 다른 범선과 마찬가지로 수명이 짧은 편이었다. 증기선이 출현하자 다수의 범선은 내리막길을 걸어 석탄, 목재, 곡물, 노예와 같이 운임이 낮은 화물을 운반하는 배로 전락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범선은 돛대를 제거하여 창고 역할을 하거나, 승리자가 된 증기선에 석탄을 날라주는 보급선이 되는 굴욕을 겪으며 삶을 마감했다. 커 티 사고는 오랫동안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항해하다가 어느 영국 선장에게 팔려 가서 훈련 선으로 부활했다. 그러다가 83세라는 노령에 이른 1952년이 되어서야 최후의 안식처로 옮겼다. 안식처는 그리니치에 있는 건식 독으로 영국 국립 해양 박물관 영내에 포함되는 장소이다. 프리깃은 빠르고 우아한 배를 가리키는 기술 용어로, 이탈리아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했다. 13~15세기까지 프리깃은 Felucca 보다. 작고 무 갑판에 삼각돛 1개와 노가 있으며, 큰 선박을 보조하는 소형 경장 범선을 뜻했다. 사각 돛이 널 리 보급되고 대양을 건너 인도로 가는 항해가 늘어나자 프리깃은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대형화한 갑판 하나에, 돛대는 처음에 2개였다가 3개가 되고, 화포는 12, 24, 32, 60파운드짜리로 2문씩 모두 8문을 탑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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