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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화포와 범선

by 부독자 2022. 10. 5.

16세기부터는 화포를 싣기 위해 측면 포문이라는 해결책이 나왔다. 영국인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 다 생각해 낸 놀라울 만큼 간결한 아이디어로, 화포를 하갑판에 설치하고 선체 측면에 포문을 만들어 화포를 발사할 수 있도록 장치한 것이었다. 포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경첩이 달린 덮개로 포문을 닫아 놓았다. 이 방식을 적용해 만든 최초의 배가 그레이트 해리 Great Harry 호다. 프랑스어 공식 명칭이 '앙리 그라스 아듀 Henry Grace a Deil'이었던 이 배는 1514년 영국 왕 헨리 8세의 선단 사령선으로 제작되었다. 무게 1000톤 이상의 대형 범선이었지만 돛대가 총 4개로 앞 돛대와 주 돛대에는 사각 돛을, 쉿 돛대와 보나벤투라에 종범을 설치한 점에서는 여전히 중세 범선에 기초를 둔 형식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당연히 이물과 고물의 선루였다. 그레이트 해리하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무기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화포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포문에서 122개(문헌에 따라 128개라고도 한다) 이 함포가 위협적으로 입을 쩍 벌리고 불을 뿜었다. 이 배에는 궁수들도 탑승했는데, 예비 물자로 매는 줄 1200개, 화살 7500통을 실었다. 몇 년 후 헨리 8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 선단 회계 책임자인 존 핸킨스 경 Sir John Hank ins에, 그레이트 해리 호의 단점을 개선하여 새로운 배를 설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이렇게 탄생한 배가 갤리온이다. 핸킨스 경은 일단 우뚝 솟은 선루의 높이를 낮췄다. 선수로는 사실상 없앤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선체는 전통적인 3:1 비율보다 더 길고 폭이 좁은 4:1 정도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범선은 '레이스 빌트 십 race built ship이라고 불렸다. 여기서 '레이스(race)'는 속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동시대의 배 중 성능이 가장 우수하긴 했지만) 매끄러운 혹은 평평한 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라즈as' 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한 킨 쓰는 여러 부분으로 나뉜 돛대를 자 창안했다. 이 방식은 증기선이 발명되어 삭고 장치가 필요 없어지기 전까지 모든 범선에서 사용됐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배들은 매우 빠르고 움직임이 민첩하여, 적선 주위를 빙 돌아 치명적인 측면 사격을 가하기에 알맞은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해군력이 국가의 발전 및 국방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영국은 완벽한 군선을 만들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조선소에서 경험을 통해 실험하기보다는 제도판 위에서 진지한 태도로 과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제임스 베이커의 아들 매슈 베이커 Matthew Baker는 최초로 조선술에서 마스터 직위를 받았다. 그를 최초로 장인의 경지에 오른 선박 기술자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베이커의 뒤를 이은 사람은 피 내서 페트병 Phineas PETT다. 이후 그의 가문은 200년 동안 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선박 설계와 제작을 담당했다. 17세기에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가지각색의 배 모형을 제작하는 일에 착수했다(당시에는 신임 해군 사령관에게 형태와 구조 면에서 정교하게 만든 배의 모형을 진상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중 몇 개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나는 배 모형에 조각 장식을 넣고 그림을 그려 훌륭하게 치장한 다음 붉은 호박단을 씌운 받침대 위에 올려, 화이트홀 런던 중심부에 있던 궁전 옮긴이에 입주하는 해군 최고가 경관에게 바쳤다.” 페트병이 만든 모형 배가 엘리자베스 왕조 때의 갤리온과 다른 점은 규모가 커진 것밖에 없었다. 길이 가 1.5배에 육박하고 흘수 폭도 훨씬 넓었다. 배수량도 많아서 3개의 갑판에 화포를 배열할 수 있었다. 해군 사령관은 그 모형을 승인했고, 1610년 울위치에 있는 조선소에서 프린스 로열 prince Royal 호를 진수했다. 프린스 로열로는 갤리온이었지만 돛대가 4개, 라는 점에서 이전의 틀을 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6세기에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에서도 선체 측면 포문을 통해 화포를 발사하는 대형 범선을 제조했지만 전문 영역으로, 영국이 제해권을 보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갤리온의 발전 과정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된 부분은 삭고. 갤리온은 돛대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게 제작했으며, 제1 사장 끝에는 짧은 수직 돛대를 세우고 작은 사각 돛인 '중간 사형 돛'을 달았다. 17세기 후반에는 갤리온에서 보나 벤 투르가 거의 사라졌다. 선장들의 항해 기술이 발전하고 선체의 효율성이 많이 증가하여 보나 벤 투르에 달린 보조 돛이 불필요한 장비로 변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영국의 선례를 따르기 시작했다. 16세기 말엽 프랑스에는 영국 갤리온과 견줄 만한 배가 없었다. 그래서 1624년 리슐리외 Richelieu 추기경은 네덜란드 선박 기술자들에게 배 5척을 주문했다. 5척 모두 갑판이 3개며 돛대도 3개인, 확실한 근대식 범선이었다. 제1 사장에는 정면 사형 돛이 달려 있고 뒤 돛대에는 사각 중간 돛이 달려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위풍당당한 발사 Vasa 호를 건조하여 진수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지나 유럽 전역에서 조선술 연구가 활발해지고 관련 논문이 출간되는 시기의 일이다. 포르투갈의 마누엘 페르난데스는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목공 술의 길Livro de TRAças de Carpintaria>를 편찬했고, 독일인 요제프 푸르텐바흐 Joseph Furtenbach는 〈배 건조Architectura Navalis) 를 펴냈다. 그래도 이 분야에서 선두 주자는 영국이었다. 1637년 피니어스 페트는 서버런 오브 더 시 Sovereign of the Seas' 호를 제작했다. 이 배는 용골 이 38.7미터에 들보가 14미터, 흘수 길이가 5.9미터 에 달했다. 당대의 다른 배를 적어도 100년은 시대를 앞서간 배였다. 또한 서버런 오브 더 시' 호는 사상 최대의 호사스러운 장식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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