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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항해의 역사

범선의 진화

by 부독자 2022. 10. 6.

또한 새로운 땅이라고 해도 이미 사람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원주민은 배를 타고 온 정복자에 의한 '문명화'에 순응하지 않고 무력으로 대응하기 일쑤였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지 중해 환경에 맞추어 설계한 이런 배가 대양에서 훨씬 높고 거센 파도에 부딪혔을 때 어떠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조건에 직면하여 범선의 진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외관과 삭고 조작법이 눈에 띄게 발달했다. 규모 면에서는 이미 목조로 만들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했다. 범선의 본질은 여전히 전투선이었고, 그런 경향은 시대가 바뀌어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배의 그림이나 상갑판 위쪽의 심미적 요소를 결정할 때도 여전히 장인이 작성한 설명서가 아니라 해군 사령관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배에 칠할 색깔은 사령관이 개인적 취향을 바탕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때때로 기묘한 색상 배합을 선보이는 갤리온과 전 장범선이 출현하곤 했다. 나일 전투가 졌을 때 영국 군선은 대다수가 검정과 노랑의 비할 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선단을 이룬 배 중 1천이 빨강과 노랑 띠로 칠했고 다른 1척은 빨강과 검정을 배합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 등장한 스페인의 산 티시나 트리니 호는 자주색에 흰 줄무늬가 있었고 다른 스페인 선박은 전체를 검정으로 칠했다. 넬슨 제독이 자신이 지휘하는 배들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칠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유로, 19세기에는 모든 군선과 상선이 넬슨식으로 칠해졌다. 예전처럼 상선에 화포를 탑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포문을 대 비 되는 색으로 칠하는 경향은 유지됐다. 영국 선단이 치른 가장 중요한 전투는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만에서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10년이나 더 육지에서의 전투를 중심으로 격렬한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트라팔가르 전투는 영국 해군의 지배력을 확증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 해군은 이후 100년간 절대 강자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했다. '팍스 브리태니커' 시대에는 해적이 사라져 대부분의 해상 운송로가 번창하고 정기적인 항해 편도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상선은 이제 방어를 위해 화포를 신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해상 운송 방면에서는, 어느 선단에 속해 있는 주요 선박들은 해군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색을 칠했다. 선박 구조 면에서는 미미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선수돌출부가 사라졌다. 선수돌출부는 갤리선과 함께 진화하여 갤리온으로 발전한 고대 그리스 범선에 있던 뱃머리 쇠붙이의 흔적인데, 이제는 형태와 기능을 상실하고 선체에 합쳐지거나 컷 워터라든가 이물 외 판, 측면 외판 등 이물을 에워싸거나 앞으로 돌출한 여타 요소와 통합되었다. 그러나 선수돌출부 난간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에도 키가 큰 배에는 선수에서 닻줄구멍 뒤까지 이물 양쪽으로 뻗은 장식 널빤지가 있다. 뱃고물 쪽에서는 선미늑판에 있던 창과 발코니와 현란한 장식이 사라졌다. 비록 일부 영국 배에서 하던 대로 견고한 널빤지로 고물을 둥글게 만드는 것에 저항감이 있기는 했지만, 적선 뱃전에 스쳐 긁히지 않게 하려는 바람이 장교들의 허영심과 편안함에 대한 욕구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 상갑판은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로 바뀌었다. 비록 여전히 갑판의 고물 쪽을 후갑판, 이물 쪽을 선수로 갑판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쉽게 눈에 띄던 높은 구조물 몇 가지가 없어졌다. 일례로 고대 해군 전통에서 유래한 컷 워터도 이 시기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렇게 하여 18~19세기의 새로운 범선인 프리깃이 탄생했다. 사실 새로운 형식을 먼저 도입한 것은 상선이었다. 주갑판에 화포를 탑재한 점이나 상갑판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해군 선박과 마찬가지였지 만, 상선에는 보트와 여분의 원대를 보관하는 중간 갑판이 없었다. 그리고 선체는 이물에서 고물까지 같은 높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겉모습보다 실용성에 중점을 둔 배였다. 이 새로운 형식의 상선은 여전히 우수한 전투선이었다. 내놓고 적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종종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식민지 땅에서 통행과 화물 수송 노를 확보하고 안전을 보장하려면 여전히 전투 능력이 필요했다. 또한 이 상선은 건현이 낮고 삭고 장치가 간단해져서 전열함보다 다루기 쉬웠고, 실제 규모도 커졌다. 18세기의 영국 동인도 무역선은 배수량이 500~800톤 사이였고(18세기 말이 되면 이 수치는 1200톤까지 증가한다), 길이는 50.3미터, 폭은 12.2미터, 흘수는 5미터 정도였다. 신세계로 향하는 서쪽 항로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던 서인도 무역선은 동인도 무역선보다 작아 500톤을 넘는 경우가 드물고, 갑판은 많아야 2개였다. 유럽 인근 해역에서 전통적인 항로로 운항하던 배들도 서인도 무역선처럼 크기가 작아서 길이가 30 넘지 않았다. 이런 배들은 처음에는 돌 대 3개에 돛은 6~8개인 고전적인 유형이었으나 점 차 돛대 2개를 기본으로 이런저런 변화를 시도하여 지역별로 이름과 형태가 다양해졌다. 소형 범선 중 가장 보편적인 유형인 버리고 혹은 브리간틴의 탄생이었다. 18세기 말 모든 해양 선진국의 해군에서 선박을 정의할 때 쓰는 용어가 어느 정도 통일된 상태였다. 그래서 기원이다. 소 불분명하고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리깃도 특정한 유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프리깃은 배 길이와 건현이 길고 주갑판에 40문 이하의 화포가 장착돼 있으며 대형 전열함답게 중앙에 노천가요 판이 있는 배를 가리킨다. 프리깃은 현대의 크루저 Cruiser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정찰과 기습공격을 위해 제작되어 속도가 빨랐다. 프리깃은 12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고 60도 각도까지 방향을 틀 수 있었다. 프리깃은 대형 전열함과 나란히 발달했는데, 제조 과정과 조종법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전열함보다 빠르게 발달하여 세계 각국의 해군에서 대부분 프리깃을 보유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프리깃은 극동 지방과의 무역에 사용된 배를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영국 동인도 무역선은 사실상 상업용으로 제작한 프리깃이었다. 프리깃은 프랑스 선박 기술자가 개발한 양식이다. 전투 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전장 범선을 약간 늘렸다. 그러자고 보다 안정적으로 화포를 발사할 수 있고 방어 능력은 전투선과 맞먹으면서도 무게가 가벼워 속도가 빠른 배가 탄생했다. 영국도 발 빠르게 프랑스식을 받아들여 곧 똑같은 장점을 갖춘 프리깃을 제조하게 되었다. 영국 프리깃은 미국으로 수출도 했다. 미국에서는 전열함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 속도가 빠른 전투선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신생 미합중국이 해군을 창설할 필요성을 인식한즉슨 시 프리깃은 미국 전투선의 전형으로 떠올랐다. 국인 선박 기술자들은 영국에서 들여온 프리깃 갑판을 뺀 전장 범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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