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선단은 원래 독보적인 강자였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완벽한 공격과 방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술이 발달하여 키 손잡이를 레버로 조종하는 대신 바퀴식으로 바꾸고 바닥과 돛 설비에 구리를 입혔다. 정범식 삼각 세로돛과 스팽커를 설치하고, 측면에 가로돛을 달아 순조로운 미풍이 불 때 바람을 받는 돛 면적을 늘린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 무렵 영국 해군 사령관은 전투 시에 적용하는 조종술과 전술을 체계화한 '교전 지침'을 발표했다. 그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수칙은 '종진從陣’ 이다. 당시 전투선이 측면에 층층으로 놓인 포대에 화포를 탑재한 구조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파괴적인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체 측면을 적 쪽으로 향해야 했다. 전투선으로 구성된 선단이 적 편대 옆에 한 줄로 늘어서면 가공할 만한 화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화포 100문을 탑재한 길 이 60미터짜리 배 1척이 한쪽 뱃전에서 발사할 수 있는 포탄의 무게는 자그마치 0.5톤이었다! 종진 전투 대형은 1~3급에 속하는 대형 전투선, 즉 '전투 범선'으로 알려진 배로만 가능했다. 빅토리 Vitory 호는 1759~1765년 토머스 슬레이트 tams Slade 경이 설계하여 영국 채텀에서 1급 전열함이었다. 현재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건식 선착장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원래 모스로 남아 있는 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배인 빅토리는 영국이 한때 보유했던 강한 해군력의 상징인 동시에, 트라팔가르 해전과 그 배의 지휘관인 넬슨 제 독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지휘관의 목숨을 앗아간 마지막 전투를 마치기까지 40년에 걸쳐 일선에서 활동하는 동안 빅토리호는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위대한 전열함의 황금기에 활약한 전창범 선다운 풍모를 잃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빅토리호의 규모는 목조로 만들 수 있는 구조물의 최대 크기에 가깝다. 이물부터 고물까지의 거리가 69.2미터, 용골 길이 가 46.1미터, 최대 폭이 15.8미터였다. 선체를 만드는 데는 최상급 떡갈나무 판재가 무려 2500개 이상 소요되었다. 외판을 이중으로 하고, 가로 방향으로 놓이는 바닥 판 부재와 프레임을 만들었는데 강화 프레임은 두께가 60센티미터에 가까웠다. 용골은 느릅나무로 만들고, 배 밑면에는 기름에 적신 리넨을 깔고 그 위에 두기를 입힌 다음 못을 박아 선체 외판에 연결했다. 목조 선체를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다. 1500년 전에 로마의 선박 제작자들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그때에는 구리가 아니라 납을 사용했지만 유사했다), 키 날개는 맨 아랫부분 폭이 1.7미터, 길이가 10.9미터가 넘었다. 키 날개를 움직이는 장치는 길이 8.7미터짜리인 키 손잡이였다. 키 손잡이는 하갑판 바로 위에서 각형 고물을 통과하여 선체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밧줄과 고래 장치들을 통해 후갑판에 있는 1쌍의 바퀴에 연결됐다. 빅토리호에는 이물에서 고물까지 이어지는 갑판이 4개 있었다. 식료품과 물, 비품과 화약은 최하층 갑판과 아래쪽 화물칸에 보관했다. 의사가 쓰는 선실과 상급 해군 사관생도들의 숙소인 선미 쪽의 사관실'은 최하층 갑판에 있었다. 사관실은 전투 중에는 수술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포열 갑판인 하갑판, 중갑판, 상갑판에는 각각 15.4, 11, 5.4킬로그램짜리 화포를 30문씩 탑재했다. 주방과 진찰실은 중갑판 앞부분에 있었다. 선원들과 해병들은 대개 포열 중갑판과 하갑판에 해먹'이라 복리는 그물침대를 매달아 놓고 생활했다. 고도로 세분되어 돛이 32개로 이루어져 있었던 까닭에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항해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특히 빅토리호는 지식 索에 삼각 세리도 안다고 뒤 돛대에는 큼직한 정범식 세로돛을 다이다. 그러나 모든 전열함이 그러했듯이 화포와 이주 외판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서 속도는 6노트를 넘기 힘들었고 최대치가 11노트였다. 빅토리호를 보면 엄청나게 큰 궁전이 물에 떠 있는 것 같다. 겉에는 황토색 띠가 3개 있고, 바로 그 부분에 마치 창문처럼 뚫어 놓은 포문이 보인다. 빅토리호는 '영국을 보호하는 나무 벽'으로 불린 영국 목조 전함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며, 대륙마다. 식민지를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심장부를 지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해군 사령관이 쓰던 선실들은 상갑판의 후미, 직후 갑판 아래에 있었다. 상갑판 중앙부는 천장 없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는데, 그곳에 들보를 가로 방향으로 걸쳐 놓고 작은 보트와 예비로 실은 원대를 올려놓았다. 후갑판에는 양쪽에서 조종하는 타륜과 5.4킬로그램짜리 포 6개가 있고, 후미에 선장이 쓰는 숙소가 있었다. 그 바로 위가 선미 갑판이었다. 선미 갑판에는 5.4킬로그램짜리 화포 2개와 타로네 이드 포 2문을 장착했다. 상갑판의 앞쪽은 후갑판과 수평으로 이어지는 선수로 갑판으로 덮여 있었고 카로네이드 포 2문을 배치했다. 빅토리호에 있는 3개의 돛대와 제1 사장에 한다는 돛의 총면적은 5481제곱미터에 달했다. 돛 장치는 18세기에도 전장 범선은 가장 중요한 군 사장 비자기를 고수했다. 이후 19세기의 배를 형상화할 때 으레 등장하는 부풀어 오른 돛과 하얗게 기품이 이는 파도와 달리, 이 무렵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림은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뻘건 불꽃이 작열한다. 당시 범선의 형태는 무기에 따라 결정됐다. 과학 인류가 자연현상에 눈뜬 18세기에도 항해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일에 가 끼웠다. 지도와 해도에 표시되지 않은 광활한 영역, 그런 땅에는 사람과 동물, 자연환경 등이 온화할 가능성보다 사납고 불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항해를 떠난 사람은 많아도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적었다. 그 때문에 무시무시한 전설이 생겨났다. 항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굳이 그런 전설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종의 반사된 영광을 누리곤 했다.
인류 항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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